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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나라엔 무슨일들이?

전두환 변호인/전두환 관련 영화/전두환 대통령 이란??

 

 

앞서, 화려한휴가/변호인/택시운전사/1987 영화들 다 전두환관련영화라는 말들이 있습니다.

정말 소름돋네요. 그럴리 없기를 .... !!

전씨의 법률대리인인 주교 변호사는 검찰이 제출한 576개의 증거목록 중 국방부 5·18 특별조사위원회 조사보고서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전일빌딩 감정서 등 3분의 1가량을 부인하는 내용의 '부동의' 의견을 냈다.

변호사는 "상당 부분이 전해 들은 내용이 담긴 증거"라며 "전일빌딩 탄흔 역시 헬기에 장착된 총기에 소총이 없는 점, 10층 방 한 곳에서만 다량의 탄흔이 나온 점을 볼 때 가능한 일인지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며 내부 교전 가능성 등을 제기했다.

정 변호사는 "지난 수십년간 헬기 사격설은 사실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었는데,

봤다는 사람도 있지만 헬기 조종사들은 절대 한 적이 없다고 함자.

회고록은 사회적 논란에 대해 개인의 의견 표명에 불과하다"고 변론까지 했다.

검찰은 광주도 회고록 배포처 이기도 한 점, 회고록 서문에 나온 범행 동기 등을 들며 변호인 주장을 반박했다고 한다.

검찰은 "인터넷 명예훼손 등은 범죄 발생 장소의 제한이 없다. 광주는 회고록 배포처 이기도 해 명예훼손 결과가 발생한 곳으로 볼 수 있다"고 밝혔는데,  "전두환은 헬기 사격을 지시하지 않았고 이를 알 수 있는 지위에도 있지 않았다고 주장하나, 그러한 사실을 미필적으로나마 인식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고자 했다. 범행 동기는 회고록 서문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전두환 불출석' 홀로 법정나온 정주교 변호사,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자 명예훼손 사건 공판준비기일이 열린 8일 오후 광주지법에 전씨의 변호인인 정주교 변호사가 홀로 법원에 나와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재판부는 전씨가 회고록에서 5·18 당시 열흘 동안 단 한 차례도 기총소사가 없었고 헬기에서 단 한 발도 발사된 사실이 없다는 취지로 주장한 점을 근거로 헬기 사격 여부를 판단하는 시점을 5·18 기간 전체 열흘간으로 정했다.

또 공소 사실과 재판 관할권 위반 주장에 대해서도 검토하겠다고 설명했다.

형사 재판에 이어 광주고법 민사2부에서는 회고록 관련 손해배상 소송 변론준비기일이 열렸다.

5·18 기념재단 등 원고 측 변호인과 전씨 측 변호인은 회고록 표현이 사실인지를 다퉈보겠다면서 치열한 법정 공방을 예고했다.

전씨의 다음 민사 재판은 다음 달 13일 오후 1시 20분 광주고법에서 열린다.

다음 형사 재판도 같은 날 오후 2시 같은 법정에서 열린다.

검찰이 증인으로 신청한 헬기 사격 목격자 21명(생존 17명·사망 4명) 중 5명에 대한 증인신문이 열릴 예정이다.


Q, 전두환 대통령이란??

1979년 10월 26일 故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후 합동수사본부에 수사본부장으로 화려하게 등장한 알려지지않던 군부내 실세였습니다. 보안사령관을겸직했으며 1979년 12월 12일 당시 육군참모총장 정승화가 전두환을 좌천시켜 군복벗기려하자 김재규내란음모사건으로묶어 불법연행함으로 육군본부 국방부를 점령 이후 특전사령관 정병주,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이외 육본지휘부를 모두 굴복시켜 12.12쿠데타는 성공.

이후 80년대 광주를 진압하고 80년도 9월 11대 대통령에취임하고 81년도부터 88년 2월까지 약 7년동안 11대,12대 대통령을겸직했습니다.


 

더 정확한 전두환 설명 -

독재의 모범을 보인 희대의 살인마... 역사에 우연은 없습니다.

호남비하는 이제 부메랑이 될겁니다

호남과 518을 이해하려면
친일독재의 지역비하와 역사왜곡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친일독재의 호남비하 과거반성 안하고 옹호하는 것이 일제 반민족범죄와 뭐가 다른가
요즘에는 패권주의자들끼리 묻고 답하기...불쌍한 영혼들 공부 좀 하세요

정보화시대로 친일독재 역사왜곡 호남비하
다 뽀록나고 있고 반민족범죄 심판받아야 된다

과거를 보면 현재를 알 수 있다
친일독재가 간첩단조작 북풍조작한 것을 보면 안다

역사적 사건을 미시적으로만 보니 의심하는 것이다
호남이 시대정신을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고 환경의 영향이 크다

후손은 선조들의 영향을 면면히 받고 산다
옛부터 호남은 해상을 통해 중국 동남아까지 진출해 선진문물을 신라나 왜에 전수하는 자부심이 있어 그들에게 지배당한 적이 없었다

당에 부역하고 임진전쟁 왜구에게 부역하고 저항보다는 시류에 따라 강자에게 굴복하는 영남과는 성향이 달랐다

친일독재가 비주류 영남중심으로 고려 조선을
조명하니 우리역사가 부정적이고 허약해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도 방치하다 전문가용으로 번역해
일반 국민의 관심을 떨어뜨린 이유가 있었다

조선이 명에 사대를 한 것은 북방 오랑캐와 남쪽 왜구를 동시에 방어하려면 국력이 소진되고 백성이 피폐해진 고려시대를 교훈삼아 화전양면책을 쓴거다

선진문물을 받기위한 우리측 필요 때문에 한 실리외교였지 주권을 강탈당한 임진전쟁 (조선을 식민통치할 장수들을 8도로 미리 배분하고 침략) 이나 일제강점기와는 차원이 다른니 물타기 하지마시라

박통의 가장 큰 죄는 일제처럼 역사를 왜곡해
식민사관을 심화시킨 것이다
때문에 국민통합을 하는데 많은 시간과 비용이
낭비될 것이다
역사를 올바로 인식해야 발전한다



친일독재가 호남비하면서 꼭꼭 숨겨놓은 조선왕조실록이 2007년 번역후 인터넷도 개설되 그동안 저지른 반민족범죄가 다 드러난다...
왕조의 번영을 바라는 태조의 태자리와 나라의 근본인 산천에 벼슬을 내리는데 전라도가 중심이다....

《 친일의 역사 (조선시대) 》

1 왜구 불법노동자 등 때문에 자본유출 된다... 
2 왜구 노동자는 늘 근심거리다... 
3 대마도는 왜구가 불법 점거한 우리 땅...
4 일제시대에 영토 문서 없앤 듯하다...
5 [세종실록 7권, 세종 2년 윤1월 10일 1420년] 
6 영남은 왜구랑 교류가 활발한 다문화사회... 
7 거짓보고와 기강해이 단호하게 대처... 
8 왜구에게 이익도 얻지만 범죄에 노출된다... 
9 탐욕으로 약화된 왜구 통제... 
10 훗날 임진왜란 화를 부른다... 
11 대마도는 우리땅... 
12 기강해이로 군사기밀 유출... 
13 왜구는 근심거리...
14 수전에 강한 왜구...
15 돈 욕심에 왜구랑 동거... 
16 양희지의 염포 왜구대비책...
17 제포 첨절제사 여승감의 첩보..
18 왜구 노동자에게 지급하는 비용으로 조세 누수...
19 이권 때문에 왜구와 동거...
20 왜구들의 전진기지 된 삼포...
21 임진왜란 예고편인 삼포왜란이다...
22 탐욕으로 기강해이와 국기기밀 누설...
23 왜구 분석...
24 전후 왜구 통제를 강화한다...

《 친일의 역사 (임진왜란 7년) 》

1 전쟁직후 왕을 지키러 북으로 진격한 호남군대...
2 같은 날 영남은 정반대 상황...
3 정운 송희립이 이순신에게 눈물로 간청해 부산으로 진격한 전라좌수군...
4 왕조주류 호남은 사생결단...
5 정월 초하루 후퇴하며 수도 한양을 생지옥 만든 왜구들....관동대지진 때 일제의 조선인 학살을 연상시킨다...
6 한양천리 걸어 행주대첩한 호남군대...
7 호남 의병장들 영남을 구하러...
8 영남이 쉽게 왜적에 부역하며 전쟁은 힘들어진다...남해안 3포 등 왜구와 유착을 조정에서 늘 근심했었다...
9 왜구 9만 진주성으로..전시 명령불복종
9-1 진주성 결사항전하고 순절한 호남 의병장...
9-8 진주성 결사항전하고 순절한 거의 유일한 영남 의병장...
10 주인없는 진주성에서 외곽지원 없이 결사항전한 호남군대...
11 진주성 직후 다시 결사항전하는 호남군대...
12 친일독재가 숨겼던 역사의 치부들...
13 전의가 상실된 오합지졸은 이름 뿐인 군대다...
14 왕을 욕하기 전에 스스로 과오부터 반성해야 된다...
15 참혹한 전쟁의 생지옥이다...
16 왜적과 싸우고 반역자들과 싸우는 이중고다...
17 주류 비주류 군사들의 위상이 달랐다..
18 영남은 반역과 기회주의로 통제불능인 듯하다...
20 공사분별 못해 전쟁대비 실기한 책임은 변명불가다...
22 부끄럽지만 잊으면 안된다...
23 왕조실록 번역안하고 호남비하한 진짜 이유...
24 명에 원조요청 공문...약무호남 시무국가... 
26 독립군 토벌한 일본군 환영행사 같다...
《 조선왕조실록으로 보는 임진전쟁 이후 》

1 전후 반역자들을 확실히 분리시킨다...
[선조실록 134권, 선조 34년 2월 1일 1601년]
좌의정 이헌국(李憲國)이 아뢰기를, "들은 바에 의하면, 전라도는 그런대로 제 모습을 보존하고 있으나, 경상도는 전부 폐허가 되어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잡초뿐이고 병선(兵船)을 정제하는 일도 전라도만 못하다고 합니다...경상도 10여 읍은 다른 데보다 더 많이 비어 있으니, 죄를 지어 입거(入居)할 사람을 전부 그곳으로 보내야 합니다. 내지(內地)로 옮겨온 자는 변읍(邊邑)의 요역(徭役)을 피하기 위한 것입니다..."

2 전후 왜구 정착촌...
[선조실록 140권, 선조 34년 8월 18일 1601년]
강첨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이원익을 따라 영남에 갔을 때 항왜 60여 명이 밀양(密陽)땅에 모여 한 부락을 이루고 살면서 양민을 침학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속히 처리해야 하니, 만약 갑자기 위급한 일이 있어 다시 일본에 투항하면 어찌 걱정거리가 안되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북쪽 열읍에 나누어 두면 일본과 서로 떨어지게 되고 오랑캐를 막는 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단히 옮기기는 어려울 듯하다"...

3 전란책임 등으로 저평가된 류성룡..
[선조수정실록 41권, 선조 40년 5월 1일 1607년]
..그러나 국량(局量)이 협소하고 지론(持論)이 넓지 못하여 붕당에 대한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한 나머지 조금이라도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면 조정에 용납하지 않았고 임금이 득실을 거론하면 또한 감히 대항해서 바른대로 고하지 못하여 대신(大臣)다운 풍절(風節)이 없었다. 일찍이 임진년의 일을 추기(追記)하여 이름하기를 《징비록(懲毖錄)》이라 하였는데 세상에 유행되었다. 그러나 식자들은 자기만을 내세우고 남의 공은 덮어버렸다고 하여 이를 기롱하였다.

4 예나 지금이나 뒤통수는 부끄럽고 야비해보인다...
[인조실록 23권, 인조 8년 7월 4일 1630년]
...상이 경연에서《중용》을 강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정경세가 ...남방(南方)의 강(强)이라는 대목에 이르자, 나아가 아뢰기를,
"... 인물은 당연히 영남이 으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방의 풍속이 그렇게 아름답다면 정인홍(鄭仁弘)의 악역(惡逆)이 어찌하여 그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니, 정경세가 답하기를,
"정인홍은 거처가 호남(湖南)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하였으니, 그가 편당(偏黨)에 고질이 된 것이 이와 같았다...

5 전후 반역향은 출사제한 되고 호남 호서 명문가는 더 경화사족화 된다..인터넷 왕조실록에 출신지 아닌 본관 분류 한 것은 착시효과다...
[현종실록 5권, 현종 3년 7월 6일 1662년]
..경석이 또 아뢰기를,
"국가는 인재를 중히 여겨야 합니다. 호남의 경우 충신과 의사(義士)가 예로부터 배출되었는데 그 기풍이 지금도 남아 있어 온통 의열(義烈)의 기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서도(西道)와 북도(北道)는 무사의 부고(府庫)라 할 만하니, 재주에 따라 조용(調用)한다면 실로 격려하고 권장하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6 조선왕조의 기반인 호남의 위상을 친일독재가 공개할 수 없었다...
[현종개수실록 11권, 현종 5년 7월 19일 1664년]
영부사 이경석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양호(兩湖)에서 수재에 대해 아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호남이 가장 심하고 그 가운데에서도 전주(全州)가 더욱 심합니다. 호남은 국가의 근본이 되는 지역이며, 전주는 또 왕업이 일어났던 자리입니다. 하늘이 다른 곳에 재앙을 내리지 않고 이곳에만 유독 혹독하게 내린 것은, 우리 전하를 사랑하기 때문에 일깨워 주려는 것이 확실합니다..."

7 임진전쟁 후 조정에서 더 배제된다...
[숙종실록 17권, 숙종 12년 9월 21일 1686년]
...이상진이 이에 아뢰기를, "...
동서(東西)로 당파가 나뉘어진 것은 선조(宣祖) 때부터 비롯된 것인데, 전해 내려오는 폐해가 오늘날에는 극도에까지 이르러 색목(色目)에 구애를 받아 전적으로 한쪽만을 배격하고 있습니다. 영남(嶺南) 지역은 본래부터 인재의 부고(府庫)라고 일컫는데도 경신년 이후로는 한 사람도 등용된 사람이 없었으며, 비록 등용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시론(時論)에 아부하는 무리에 지나지 아니하니..."

8 이조판서 박세채의 시무책...
[숙종실록보궐정오 19권, 숙종 14년 6월 14일 1688년]
"...영남은...진실로 풍습이 다른 곳과 통하지 않아서 인물(人物)이 나지 않으므로,...과 같은 사람이 없는 지가 지금 4기(紀)를 넘었으니, 이것은 진실로 의논이 괴격(乖激)한 소치이며, 조가(朝家)에서 포기(抛棄)한 데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드디어 근년에 권간(權奸)의 시대에 한 번 나와 사나운 불길을 조성(助成)시키는 것을 면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한 도(道)의 큰 수치라 이를 만합니다..."
* 1기 : 12년

9 이인좌 정희량 반역으로 130 여년간 출사제한이 더 강화된다...박씨 전씨 쿠데타는 우연이 아니다...
[영조실록 53권, 영조 17년 1월 6일 1741년]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영남은...지금 조정에서 벼슬하는 자는 거의 없어지다시피 하였습니다. 지방의 풍속 또한 녹봉(祿俸) 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므로, 과거에 급제하여 더러는 10년, 더러는 20년 만에 까닭없이〈벼슬을〉버리는 자가 많습니다. 무신년의 사건은 일종의 그릇된 무리에 불과하며 반드시 사람마다 이와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10 비주류 영남으로 조명하니 조선이 약하고 부정적인 나라가 되었다...
[정조실록 16권, 정조 7년 10월 8일 1783년]
호남 민인에게 윤음하다..."아! 이 호남은 곧 조가(朝家)가 근본(根本)한 땅으로서, 한(漢)나라의 풍패(豊沛)와 같고, 하(夏)나라의 형양(荊揚)과 같은 곳이다. 군국(軍國)의 수용(需用)과 공사(公私)의 경비가 오로지 이 일로(一路)에 의존하고 있다...공상(供上)하기를 마치 효자가 부모 봉양에 힘을 다하듯이 했으니, 비록 풍년 든 즐거운 해라 하더라도 조심조심 하느라 수고롭고도 피곤했을 것이다..

11 친일파의 통일반대하는 지역비하 반민족 범죄가 다 드러나기 때문이다...
[정조실록 26권, 정조 12년 11월 11일 1788년]
...상언(上言)한 영남 유생들을 불러 접견하였다. 상이 이진동 등에게 이르기를,
"...그러나 당목(黨目)이 한 번 생겨난 뒤로 취미가 각기 달라져서 근래에는 조정에서 영남을 거의 다른 나라처럼 보니 진실로 개탄스럽다. 인재가 부족한 이때를 당하여 영남의 허다한 인사 중에는 반드시 등용할 만한 사람이 많을 것이니, 만약 수용(收用)해서 함께 조정에 늘어서게 한다면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공평하게 하는 도에 부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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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 :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아베 노부유키' (마지막 총독) :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데, 조선민이 제 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찿으려면 100년이란 세월이 훨씬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결국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 조선은 결국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략할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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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 펌글>

문) 전라도 사람들에 대한 편견

답) 걍 인터넷상 극소수의 자들이 여러 아이디를 통해 선동하는 것입니다....

수도권만 하더라도 지역색 드러내면 바로 매장입다...

마치 인터넷 게임처럼 가상현실을 스스로 만든 것이지요.....

그래도 이해에 도움이 되시라고 장문 답변 올립니다.... 오히려 이런 극소수의 어리석은 행동 덕분에 일제시대 이후로 철저히 왜곡되고 감춰졋던 호남의 역사가 밝혀지게 되었으니 오히려 감사해야 할 듯 합니다.......

냉전시대 개발축이 영남 중심이 된건 이해한다고 쳐도, 일제식민사관처럼 경상도사관을 도입하여 역사까지 왜곡하고, 지역감정을 조장해서 경상도의 독점을 정당화시켜버린 것이 지역감정이 원인이며 그 대상이 된것이 전라도입니다.

충청도는 양반소리를 들어야 하니 속으로만 앓아야 하고, 서울 경기는 떡고물이 떨어지는 영남에 우호적이 될 수 밖에요. 전라도는 반발하니 경상도가 골치가 아픈 겁니다. 덕분에 균형개발 한다고 생색내기로 서해안도 개발 시작 한겁니다. 전라도가 견제 안햇으면, 계속 서울과 서해안은 전쟁준비나 하고 경상도만 집중햇을 가능성이 큽니다.

대부분 쓸만한 대기업과 정부요직등 경상도 출신이 장악함에 있어서, 이를 정당화 시키는 도구로 경상도 사관과 지역 감정이 동원됩니다. 서울 경기 삔질이, 충청도 멍청도, 전라도 깡패 경상도는 사나이라는 당연히 부와 권력은 경상도가 차지해야 한다는 논리가 정당화 되고 반발을 최소화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몽이 되어야 하죠 그래야 괜히 종로에서 뺨맞고 엉뚱한 한강에서 화풀이 하진 않죠 ㅎㅎㅎㅎㅎ

무엇이 왜곡인지 사례를 들어 설명하지요. 단언컨데 박정희 이전 지역감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호남이 같이 움직인 사건들이 많았지요. 참고로 박정희 대통령은 전라도의 압도적인 지지 덕분에 당선된 분입니다.

이하글은 특정지역에 유리한 사료나 자료가 많은 점을 고려하면, 부분적으로 설명이 부족한 부분이 있으나 전체적인 맥락은 틀림이 없음을 밝힙니다.


식민사관의 폐혜

세계사적으로 한번 피지배를 당하면 엄청난 피해를 봅니다.
식민사관은 호남과 백제역사의 은폐 및 파괴 입니다(호남은 조선왕조의 발상지이고,,, 백제는 고대 일본과의 관계를 보여주기 때문이지요).....일제시대 수많은 사서가 불타 사라지게 됩니다....식민통치에 유리한 자료만 남기게 되지요....

따라서 영남권력층은 독재의 정당화로 경상도사관을 주입하게 되고,,,,, 자존감을 상실한 호남은 반발하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과거에는 왕고 신하, 양반과 상민의 대립이지,..지역간 갈등이 개입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50년대 10대기업중 절반이상이 호남세력임에도 박정희의 호남지지가 높았던 것을 보면 독재에 대한 반발과 기존 기득권층에 대한 개혁의 열망이 컷다고 할 수 있으며 지역감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또한 김대중 등장시에도 영남의 김대중 지지는 높았습니다....

이와 같은 점을 볼때 식민사관의 폐혜가 크고, 현재에도 특정지역 비하글이 버젓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정신적 독립은 아직 못햇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왜곡된 역사를 바탕으로 발생한 지역갈등 속에서 무슨 발전과 번영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호남의 역사적 자존감을 돌려주는 것이 일차적으로 진행되어야 합니다...근거 또한 충분합니다...


좌우 논란

건국초 부터 60년대까지 전라도는 우파성향 경상도는 좌파성향이 강한지역이었읍니다.

건국세력인 한민당은 전라도가 본거지이며 이승만 박사는 전주 이씨입니다. 경상도는 남노당이 주도하는 대구폭동등 좌파성향 폭동이 많았던 지역입니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더 많았다는 겁니다.

대구폭동은 건국후 최초로 발생한 좌파성향폭동으로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매우 큰 사건으로 계엄령 선포되고 이후에도 영남지역은 경찰서 습격등 치안이 불안한 지역이었으며 다른지역 반란의 도화선이 됩니다.

그런데 역사는 축소하거나 대충 넘어가지요 이건 무얼 의미할까요

그런데 박정희 이후 경상도 독점 이후 민주주의 자본주의 수호자인양 얼굴이 싹 바뀝니다. 거기까지는 좋은데 엉뚱하게 전라도에 좌파니 빨갱이니 하는 논조로 왜곡합니다. 공부좀 하는 영남인은 스스로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전라도의 주장은 독재하지 말자는 것, 민주화 하자는 운동, 경상도만 독점하지 말자는 주장등 좌파하고는 거리가 먼 것들입니다.

* 옛날이나 지금이나 영남인 호남인 다 똑같은 사람이고 격의 없이 대합니다. 문제는 독재로 부와 권력을 지배해 버린 경상도 지배층이 문제입니다. 한번 잡은 것을 절대 포기하지 못하고, 또한 유지하기 위해 지역감정 조장과 경상도사관 주입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겁니다.


투표성향 오해

투표성향에 대한 오해인데 박정희에 대한 지지는 호남이 영남보다 비슷하거나 높았습니다. 오히려 5~60년대만 해도 영호남 공조하는 성향이 많았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영호남이 같이 움직인 사건들이 많았지요

1970년대 김대중과 선거에서 가까스로 이긴 박정희가 영구집권을 꿈꾸고 유신헌법을 통해 선거자체를 없애버리고 김대중과 호남에 차별을 가합니다(지역감정의 사실상 시작이죠) 이를 계기로 호남민심도 박정희에게 등을 돌리고 김대중에게 집착하게 된 계기가 됩니다. 이후 선거에서 필승전략은 지역감정 조장해서 표가 가장 많은 영남표 확보로 흘러 가게 됩니다.


경제성장부분

물론 개발독재를 통해 국부와 위상을 높인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냉전시대 미국영향권에 있는 나라치고 발전하지 않은 나라가 없습니다. 조그만 섬나라인 대만도 위상이 대단하잖아요 일본이 핵심기술 지원하고 미국이 수입해주고 정말 쉬운 구조입니다. 단지 방법과 속도 차이라고 봐야지요

요즘도 우리 수출이 늘어나지만, 앉아서 돈버는건 핵심기술을 지원하는 일본이 버는 구조입니다. 우리도 돈을 벌지만 이윤이 박합니다. 그러다 보니 기업들이 환률차익에만 목매게 되는 것입니다.

자동차,조선,반도체,휴대폰 이런 산업은 장치산업이라 하여 왠만한 교육수준이 있는 나라가 따라 붙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핵심기술,원료,설비장비 일본등 선진국 지원 없으면 우리나라 산업 올스톱입니다. 이건 알고 계시나요?) 예로 중국 어느새 금방 쫒아오잖아요, 북한도 개방해서 일본,독일등이 지원해주면 우리정도 수준되는건 시간문제입니다. 그래서 경쟁은 가면 갈수록 치열해 질수 밖에 없습니다. 단지 차이는 디자인과 마케팅의 차이입니다.

결코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유독 경상도 출신이 대기업을 운영하므로 발전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식민시대와 전란을 거친후 아무것도 없는 우리민족이 이만큼 국부를 창출한 것은 정말 다행이고, 또한 핵심기술 확보와 국산화률을 높이면서 일류국가로 거듭나야 하는 중요한 기로에 있습니다. 그런데 말도 안되는 지역감정에 얽매여 있고 냉정시대 유물인 남북 대치관계 부활은 오히려 우리민족의 퇴보를 부를 우려가 높습니다.


역사적인 악평

역사적인 악평 상당히 재밋더군요 이하 요점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역사적인 기록이라며 전라도 악담이 많이 나오죠, 이거 죄다 발췌하면 악담없는 도가 없습니다. 경상도 더 심한 악평 많습니다..(경상도 위주로 역사 악담 모으면 얼굴 못들고 다닙니다). 상대적으로 전라도에 좋은평이 많습니다. 호남이 없으면 조선도 없다, 충절 예의 지향이다 등등 그리고 각 지역마다 악담이 계속 등장하는 것은 왕조국가 특성상 견제에 의한 통치방법입니다.

직장생활 해본분들 사장이나 상사들이 악담을 더 많이 하지요 견제심리입니다. 너를 깍아 내려야 내가살기 때문이지요 넘 간단한 이치 아닌가요. 더구나 각 지방 수령관이 부정부패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 각 지역민 험담하는 것이 더 많을 수 밖에 없는 것은 기본중에 기본입니다.

호남(사치,낭비,사기 VS 풍류,예향,충절예의지향) 영남(근검,절약,우직,인재보고,사나이 VS 무뚝뚝,우매하다, 보리문둥이) 부분적으로 서울 경기와 전라도가 유사한 평이 있구요

대체 이런 정돈데 대체로 맞을 겁니다.. 미리 말하지만 뭐든지 인과관계가 있습니다.

호남의 평은 악평과 찬사가 비교적 많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육로와 뱃길로 서해안 지역을 자유로이 왕래했으므로 교류가 많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농경시대 전라도는 부의 상징이였습니다.. (계집질은 평안도 돈을 벌고 싶으면 전라도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지요 참고로 박정희 이전 10대기업중 절반이 호남세력입니다.) 서울은 권력은 있으나 부에서 만큼은 호남이 상대적으로 우월했읍니다... 즉 호남인은 서울가더라도 당당했고 꿀리지 않았다는 거지요 때론 멋대로 햇겟지요 그러니 악평이 따르지요. 조선조 전라도 관직은 요직중의 요직입니다. 즉 먹을게 많지요 그러다 보니 관료들이 호남민을 폄하하는 글들도 눈에 띄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글들도 몇개 되질 않지요...... 그러니 호남민이 부끄럽게 생각할 내용이 전혀 아니지요

경상도는 지리적으로 일제시대 경부철도 전까지 타지역과 교류가 뜸합니다. 즉 말투와 억양이 그러하고 경상도 빠른 말은 솔직히 지금도 알아듣기 힘듭니다. 그러다 보니 과거에는 어느정도 있는집안 출신들이 주로 상경햇고 매너도 좋았겟지요..... 속칭 사람들은 경상도 사람들 무뚝뚝하다 하는데, 내막을 보지요 영남인들이 타지역으로 가게 되면 교류가 적고 억양이 심하게 차이가 나는 관계로 어색해서 조심스러워지고 말수가 없어진 거라고 봐야 함이 타당합니다. 그 이유는 영남지역에서는 정말 8도에서 가장 말이 많고 빠릅니다. 경상도 분들 맞지요 그리고 과거 풍수지리 중요성이 강조되는 시대이므로 산세가 좋은 영남에 대한 호평도 있습니다. 그런데 고려조, 조선조 영남인은 비주류입니다. 그러다 보니 야당격인 정파에서 영남인을 끌어들여 세를 보강하는 형태가 많이 발생하고, 이런 과정에서 영남인재를 적극적으로 추천해 달라는 취지에서 영남은 인재의 보고라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퇴계 이황 선생 영향도 있지요......

충청인은 현대에서 양반 그리고 멍청도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건 현대에만 통용된다고 봐야 함이 맞습니다. 즉 서울 경기와 영남 호남세에 이쪽또 아니고 저쪽도 아닌 어중간한 태도를 보이다 보니 그리 된 것이구요

과거 고려조 조선조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충청도는 과거 군사적 요충지가 많아고,,, 송시열 선생만 보아도 조선을 신하의 나라로 불리게 하실 정도였지요,,,,, 따라서 과거의 충청도는 강건하고 기질이 강하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오히려 호남인이 편견으로 인해 조심스러워지고 오히려 말수를 아끼는 경향을 보니고 상대적으로 가난하므로 근검 절약을 하게 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런데 영남은 오히려 당당하고 꺼리김이 없고 부가 넘치다 보니 사치할 가능성도 커지게 되는 것입니다.

과연 농경사회에서 호남과 산악지형인 영남이 비교가능한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사는 모습과 행태가 완전히 틀립니다...... 비옥한토지,바다,뻘은 곧 풍요와 부의 상징입니다..... 또한 중앙정부의 집중관심대상입니다... 사치,낭비,풍류,영악,사기등 이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군상아닌가요(더군다나 서울,경기,충청도 유사한 평이 있지요).... 즉 호남은 많은 인구가 모여 살면서 사회, 경제활동이 왕성햇다는 반증이라 할 수 있지요.....전주와 나주는 과거 작은 한양으로 불리웠으며 가장 번화 하였습니다....한양 다음으로 전주를 따라올 도시는 없었으며,,,, 나주의 대성전은 성균관에 버금가는 가장큰 국립대학이였읍니다.....

즉 먼 훗날 북한이 남한의 여러 사회문제를 근거로 비방하는 것과 다름 아닙니다...

농경사회에서 영남은 비교적 삻의 형태가 단조롭습니다. 호남은 경제적으론 물론이려와 당대의 인물을 배출 하였으며 조선의 문화적 보고입니다.... 오히려 호남은 서울과 비교함이 옳습니다....

조선조 최고의 명신인 황희 정승은 장수 황씨 이며 문무를 겸비한 최고의 신하인 김종서는 호남인이며 세조의 장자방 신숙주 또한 호남인입니다....이후 주기론 주리론을 융합 사림의 시대를 연 기대승, 이발, 정철, 박순 등 당대의 인물을 배출하며 절정에 이릅니다... 또한 예학의 태두 김장생(논산인물설, 논산은 과거 호남임)은 광산김씨이며 그 아들인 김집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는 전무후무한 영광을 누립니다..... 또한 병자호란등 혼란기때 정국을 주도한 최명길 또한 호남인입니다.....

또한 이후로도 성리학 뿐만 아니라 양명학, 실학, 동학등 새로운 사조의 산실이기도 합니다.... 솔직히 영남분에게는 미안하지만 영남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지위에 있던 곳이 바로 호남입니다....

이후 경화 사족화 진행으로 18세기 19세기 호남 과거 급제율이 떨어지긴 하나,,,, 조선조 전체 8% 영남 12% 영남의 절반정도인 사이즈에서 이정도면 훌륭하지 않나요? 또한 영남은 조선조 전체를 통털어 급제율이 10%를 넘었다곤 하나 이는 그만큼 고위관료와는 거리가 먼 하급관료형태의 지방관 형태에 머물면서 서울 경기에 정착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는 반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호남은 당대의 가문이 중앙정계에 진출 경화 사족화 되면서 18,19세기에 과거급제율이 하락하였다고 보면 됩니다...... 사림 등장시 호남의 급제율은 14%에 이르고 다수의 장원급제자를 재출 이후 정계를 장악합니다......

즉 이와 같은 사회 경제적 중심지이므로 당연히 갈등이 많이 발생하는 것을 비방의 재료로 삼는 다는 것은 합리성,이성과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먼 훗날 북한이 남한의 여러 사회문제를 근거로 비방한다면 남한은 정말 할 말 없는 지역이 됩니다.....

즉 이와 같이 사람사는 곳은 특별히 어느곳이 잘나고 못난 것이 없습니다. 단 그 시대의 영향을 보일뿐이지요 본질적인 인성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참고로 현재 인터넷 상에 호남 비방글이라며 이런 내용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문제가 보입니다. 그리고 뭔가 조직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미리 자료, 근거 준비한 것들도 그렇고요...즉 불특정다수가 아니라는 얘기지요

이익(성호사설),이중환(택리지) 이 두분은 남인 인사로 비영남인물이며 경기출신이지요,,,, 그런데 이 두분은 노론 광산김씨에게 탄핵된 분들로 재야 인사급이네요,,, 광산 김씨가 어딘줄 아시나요! 그리고 이 두권 말고 수많은 조선조 사료는 다 어디 있나요?

더군나나 이익과 이중환은 증손자 지간입니다.... 즉 일개 재야인사 집안이 특정파벌에 원한을 가지고 기록한 글을 특정지하 폄하에 동원한다는 것는 영남분들이 보기에도 어이 없지 않나요 ?

즉 지금 5급정도 관료가 은퇴후 쓴 기행문이 200년후 부각되어 지역감정에 이용되는 어이없는 경우라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안정복, 정약용 이들도 나타나는데 ..... 이익의 문하생이고 영향을 받는 분들로 하급관료이거나 재야 출신이네요..... 즉 이건 그만큼 당시 정치계에 호남의 영향력이 막강햇슴을 보여주는 반증이네요..... 오히려 호남비방을 위해 동원된 위인과 글들이 오히려 호남의 위상을 높여주는 것이 되었네요.....

세종실록과 성종실록 글인데 여기에서도 호남언급이 나오는데 관련 인사가 영남인물로 나오네요.....

하멜은 언급하지 않겠습니다...외국인 시각을 이용 동족을 비방하다니요 있을 수 없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더군다나 제주도 서울에도 살았고....구체적인 전라도 언급은 전혀 없구요.....벨테브레(박연)에게 들은 이야기를 표현한 것도 있구요...

5~60년대 신문기사라며 나오는데 지역신문인지 중앙지인지는 모르겟구요 매일 발행되고 신문 가짓수 많을 텐데 그 정도면 매우 작은 분량이며, 호남 예향, 영남 보리문둥이 뭐 이런 표현은 전혀 없던가요?

그리고 영남 우월하고 다른 지역은 허접하게 나오는데 문제 있지 않나요? 영남분들

호남 그렇게 욕먹을 역사적 근거가 없고, 또한 조사결과 양반중의 양반이였습니다... 영남은 솔직히 비교대상이 되지 못하였고 충청과 서울 경기가 호남과 비견할 만 했습니다.... 그런데도 특정지역을 비하하는 글들만 바췌해서 비방하는 것은 잘못된 행동입니다.. 반성하셔야 합니다...

전체적으로 호남 비방글을 보며 느낀건데.... 왕조시대 호남의 경제적,정치적 위상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높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근거 또한 충분하구요....더군다나 은폐와 왜곡이 진행된 상태에서도 이정도면 실질적으로는 우리가 모르는 역사적 실체가 훨씬 더 많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더군다나 고대어의 해석은 정말 난해하고 경우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을 할 수가 있는 경우도 많지요

역사적인 인물 과 본관의 오류(필독입니다)

정말 고치고 바로 잡아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즉 김대중이 김해김씨이므로 영남인물이 아니며, 이승엽 부모가 전라도 출신이라 하지만 이승엽은 경상도 사나이 입니다.... 이는 고려조 조선조 동일 합니다.

정도전,성삼문은 본관은 영남 충청인, 신숙주와 서재필은 본관은 영남 호남인, 권율 본관은 영남 강화도 등) 이와같은 케이스가 대다수입니다.....

대부분 지연,학연,혈연이 주성장지에서 형성되므로 중요합니다.

단적으로 호남은 조선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정수입니다... 양반중의 양반입니다.

광산김씨는 연리광김(연안 이씨,광산 김씨)이라 하여 조선조 양반중의 양반이라 불리웠으며 , 최씨중에는 전주최씨가 으뜸이고, 박씨중에는 반남박씨가 벼슬연력이 가장 화려합니다. 전주이씨는 당연히 왕족이므로 다른 씨족과 비교 불가이구요; 이들 성씨는 조선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프리미어 리그로 따지면 빅4이지요)

경제적으로는 물론이려니와 수많은 가사문학과 고전소설(춘향전,흥부놀부 등) 판소리등 죄다 호남 기반 아닌가요,, 또한 정치적으로도 훈구파를 거쳐 동인 서인, 노론,소론등 정치적 주류계층이었습니다.

영남에 유리한 자료가 많고 부각된 상태에서 역사적 인물 보니 이황,유성룡 등 몇분빼고는 대부분이 하급관료이거나 재야인사급이더군요,,,, 그럼 그 수많은 고위관료와 인사는 다 어디 있을까요? 해답은 전주이씨와 광산김씨 스토리를 보고 답을 얻었습니다.... 이분들이 조선조 내내 과거시험은 물론 고위관료까지 압도를 하였네요,,,솔직히 다른 씨족과 비교 불가 수준입니다.... 솔직히 영남은 본관으로 따지기가 어려운게 통일신라때부터 경기,호남,충쳥등 서해안 지역으로 토착해 버린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더군다나 통일신라때 창씨개명도 고려를 해야겟지요 (타지역 출신의 경상도 정착은 과거에 거의 없었다고 보면 됩니다.. 하지만 요즘은 정반대지요) 즉 출생지 기준으로 대과급제자를 따지면 경북지역에 편중되고 하급관료 형태가 많다고 할 수 있으며 고위관료는 드물다고 할 수 있습니다....조선후기로 갈수록 이런 경향은 두드러집니다.(즉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대과급제자 많지 않고 고위관료는 더욱 드물었다는 겁니다) 호남의 경우는 경기일원에 토착화되기도 햇지만 전주,남원,나주 등지에서 꾸준하게 대과급제자를 배출하고 고위관료로 등용되엇다고 보면 됩니다.

예시) 반남박씨의 경우,, 전체 인구 빈약하고 대과 급제자도 상위권은 아니나 판서급(장관급)이상 고위관료를 무수히 배출합니다.....

어찌보면 영남출신은 지역안배차원의 하급관료 등용이 이뤄졋다고 할 수 있으며 고위관료와 정치세력과는 거의 무관하다 할 수 있습니다. 후기로 갈수록 이런경향은 심해지지요(서북지역 정주가 대과 급제 2위를 차지한 것을 보면 변방의 지역안배차원성격이 강하지요) 즉 동쪽과 북방은 산악지형으로 왕조시대에는 통제가 쉽지 않습니다....

소과(생원,진사) : 벼슬없는 명예직

대과 : 관료에 등용되나 대부분이 하급관료 형태(9급정도) 단 장원급제는 5급정도

이와 같이 유독 영남 인물과 지역만 역사에 강조되다 보니 고려와 조선의 역사가 빈약해지고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식민사관과 다를 게 무엇이 있겠습니다. 고치고 바로 잡아야 합니다.

조선초 훈구파는 영남의 주무대가 아니므로 마치 훈구파에 대해 부정적이 느낌을 주고 있으며,,,이후 사림등장시 이황과 유성룡 강조하며 영남이 득세한것처럼 보이게 하는데 사림득세시기에도 영남은 비주류였습니다.

이후 조선 중기 이후 인조반정시 경상우도, 이인좌 난 계기 경기도 전체 관직등용 제한받습니다.

예시) 조선초기 훈구파 집권시 영남은 비주류였으나, 호남은 김종서, 신숙주 등 지속적으로 영의정을 배출하면서 주류계층이었슴을 알 수 있습니다. (당연히 출생지 기준이지요)

또한 사실상 조선과 유교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곳은 조선의 제2의 수도라 할 수 있는 전주입니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한옥이 있으며 한양처럼 도심에 성곽이 있는 유서깊은 곳입니다. 안동은 일개 고장에 불과합니다. 후기 안동김씨 세도와도 전혀 관련없는 곳이지요 안동이 조선을 대표하는 고장인양 부각된것은 애향심이 지나친 경우라 할 수 있겠습니다.

참고로 조선 후기 세도가인 안동김씨는 서울 경기지역이 주류이고 그들 스스로도 실질 거주지인 장동김씨라고 자칭하였습니다. 굳이 안동김씨임을 내세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남학파 착시현상 (필독입니다.)

기호학파 영남학파는 현대의 분류기준이고, 조선조 이런 분류 전혀 존재하지 않았으며 지역 특색 없습니다.

이황의 주리론 계열은 별 정치적 영향력 없이 소멸합니다...(대표적인 주리론 인사는 유성룡,김성일에서 그치지요) 이황 본인이 정치세력과 무관합니다.

이이의 주기론이 이후 서인,동인, 남인 ,북인,노론,소론의 정치적 기반이 됩니다.

참고로 조선조 막대한 영향을 끼친 주기론은 기대승-이이-김장생등(광산김씨 계열)-송시열 등으로 이어지네요

또한 최초 붕당인 동인 서인에서도 지도자급 호남출신이 나타나며 영향력이 상당햇음을 알수 있습니다. 한번쯤은 들어봄직한 인물을 올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서인(심의겸) - 정철(서인의 영수로 기대승의 문하생이며 호남인사)

동인(김윤후) - 이발(동인의 지도자로 호남 출생),

또한 대북영수 이이첨 (경기), 소북영수 유영경(전주유씨), 남인영수 윤휴(호남),윤선도(호남), 서인및노론 영수 박순(호남) 김계휘(호남), 김장생(광산김씨), 송시열(충청),최명길(호남),이이명(호남), 소론영수 윤증(논산)최석정(전주최씨)박세채(호남), 등 가히 호남은 사림등장부터 이후 4색당파의 중심에서 경기,충청과 더불어 주축세력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남은 유성룡(동인),정인홍(대북)정도라고 볼 수 있읍니다...영남은 오히려 재야 학자층에 유명인물이 많으며 정치적 세력과는 거의 관련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사림등장후 훈구파와의 수많은 사화의 그 중심에는 기호사림과 더불어 호남사림이 있었읍니다..... 동인을 흔히 영남학파로 오해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으며 호남세력이 서인 뿐만 아니라 동인에서도 주류 세력이었습니다...영남사림은 비주류였습니다.......

* 참고로 사대사화를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무오사화 : 영남사림이(김종직 등) 많이 희생당하는데 그 탄압세력이 유자광(호남)등 훈구파 세력이네요

갑자사회 : 이때 폐비윤씨와 연루된 훈구파와 영남사림이 결정적인 타격을 받습니다....

즉 양대 사화에서 영남사림의 정치적 세력이 사실상 결정적인 타격을 받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이후 영남사림은 정치화를 꺼리게 된 계기가 되지요....이황, 유성룡 두분도 사실상 정치판과 거리를 두고 은거를 하지요....이런 연유로 희생을 당하지 않게 됩니다....

기묘사화 : 조광조 위훈 사건사건인데 이때 조광조 뿐만 아니라 호남사림이 희생을 당합니다.... (역사상 전혀 부각이 안되지요)

을사사화 : 흔히 윤임 윤원형 훈구파 외척간의 다툼으로 알고 있는데 이때도 호남 사림이 희생당합니다..

기축옥사 :서인이 동인세력을 탄압한 사건으로 흔히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때 호남 사림이 가장 큰 타격을 받습니다.....즉 호남 사림은 서인뿐만 아니라 동인에서도 주류세력이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이와 같이 사림등장시 호남의 영향력이 상당했고 사실상 훈구파 시대를 끝내고 사림의 시대를 연 주축세력이 바로 호남 사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로도 호남은 4색당파에서 지도자급 인물을 배출합니다...(이 시기 허균은 저서에서 호남을 인재의 보고라 칭하였지요)

* 좀 심하게 표현한다면 선조때까지 호남출신과 세력간의 대결이라고 까지 할 수 있습니다...

기대승이란 인물은 호남출신으로, 역사상 대표적으로 저평가된 인물로 부제학까지 지내셧으며, 이황선생과 사단칠정으로 유명한 분입니다.....한때 이황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이후로도 서로 학문적인 교분을 쌓으면서 상호존중하는 관계지요. 기대승과 이이선생은 사제지간은 아니지만 기대승의 주기론은 이이선생이 완성합니다.

박순(호남)은 이이 성혼과 더불어 서인의 영수로 서경덕의 문하생이고 중년에는 이황선생에게도 수학하였던 분으로 훈구파 윤원형(파평윤씨)등을 목숨을 걸고 탄핵하여 세도를 끝내고 사림의 시대를 열게한 장본인입니다...조선 정치사에 커다란 전환점을 마련한 분입니다...(당시 정황과 분위기가 영화 글라디에이터의 막시무스장군 역할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더군다나 이황선생에게 대제학을 양보하는 아름다운 일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며, 선조의 총애를 받고 영의정등 관직생활 40연간 재산을 모으지 않고 주위를 돕는 청렴한 분이기도 합니다. 만약 영남출신이라면 상당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을 만한 업적과 스토리를 가지고 있지요....아마도 호남출신이므로 전혀 부각이 안되었다고 봐야지요

즉 이와 같이 기대승, 박순, 이황선생 관계만 보아도 과거에는 전혀 지역감정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어리석은 지역감정의 단초를 제공한 일제 식민사관의 폐혜가 상당함을 이들 관계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하 부연설명합니다.

그리고 영남지역은 조선조 당파싸움에 대한 책임은 전혀 없습니다.

대체적으로 식민사관에 근거한 경상도 사관은 조작은 아니지만 조작에 가까운 왜곡이 눈에 띕니다.

즉 영남에 불리한 사건은 큰사건임에도 의미를 축소 회피하거나 또는 유리하면 과장 확대해석하는 경우이지요

이케이스는 후자의 케이스입니다. 이하글에서 당파 학파는 고려조 조선조 지역특색 전혀 없습니다. 이점 염두하시구요

조선초 건국세력은 신진사대부입니다. 신진사대부의 등장시 영남측 인물이 많이 등장합니다. 당연히 다른 지역 인사도 많지요.....유교는 불교사회를 대체하는 이론이자 고려조 소외된 세력의 학문입니다. 그러한 관계로 영남측 인물이 눈에 많이 띕니다. 이후 친고려, 친조선으로 갈리고 이후 신권주의 왕권주의로 갈리게 되는데 정몽주(친고려) 정도전(신권주의)가 숙청되고 왕권주의가 주류를 이루니 곧 역사상 훈구파입니다. 배제된 이들은 낙향하여 열공하는데데 이들중 영남인사가 많았습니다. 즉 조선중기 이언적, 이황 주리론의 탄생의 근거가 되지요.....그리고 서해안 지역은 이이의 주기론이 탄생하게 됩니다. 또한 주기론(경험론,현실론) 주이론(원리적,이상적) 지역 특색 없습니다. 서해안 지역 이황을 쫒는 무리가 많아고 영남또한 주기론 쫒는 무리 많았습니다.

조선 성종때부터 훈구파를 대체하는 사림들 등용이 이뤄지고 선조때까지 사화로 얼룩집니다.... 즉 양대세력이 붙으니 장마전선처럼 호우를 뿌린시기이지요 이때까지만 해도 사림들의 등용은 하급관료형태이고 고위관료는 훈구세력입니다.

이후 선조때 사림이 득세하며 토착화된 출생지 기준으로 영남인 최조 영의정이 탄생하게 되는데 유성룔(주리론)입니다.영의정이므로 영남인사가 많아 졋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림(주기론,주리론)이등장하면서 영남인 최초의 영의정이라는 의미입니다.....주기론 주리론은 학풍으로 끝나고,정치적인 세력은 당리당략입니다. 서인 동인 남인 북인 이후 뭐 시파 벽파 등장하는데 지역 특색 전혀 없고 학풍론쪽으로는 주기론이 대세를 이루고 주리론은 밀려나게 됩니다. 이런한 정파역시 주류는 서해안 지역 권력가입니다. 그리고 영남은 세가 약한 파에서 영남인사를 끌어들이는 형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2중대 역활이지요 즉 영남독자 정치화되어서 권력 다툼을 한 케이스는 전혀 없습니다......인조반정후대북파제거시영남도 희생을 당하는데 이때 경상우도가 관직등용 금지됩니다. 이후 노론 소론으로 이어지는데 이또한 서해안 지역권세가들이 무대이지요 이때도 세가약한 소론이 남인계열을 끌어들이는데 이때 영남인도 다수 등장합니다.그런데 남인 또한 서해안 권력가가 주류이지 영남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인좌난 이후 서해안 지역 남인이 실각하자 영남 남인은 정계진출 통로가 사라지게 됩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이인좌 난은 소론이 주축이고 반란은충청도에서 발생하였으며 충청 호남의 소론, 남인계열도 가담하였습니다.. 그런데 진압이후 엉뚱하게충청도가 아닌 영남이 피해를 봅니다.. 즉 호남 충청은 노론의 텃밭이므로 처벌할 수 없었던 겁니다,,,, 영남의 경우는 그동안 소외감이 폭팔한 케이스로 영남 남인 가담이 많았고 저항이 심했습니다.....그러한 관계로 평영남비를 세우고 관직등용 금지됩니다....

따라서 대북파 제거시 경상우도, 이인좌 난 계기 경상도 전체, 영남차별의 역사가 200년이 넘는 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따라서 학풍에 의한 주리론의 대가 이황선생의 업적만 해도 영남은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만한 것입니다....

하지만 영남이 독자적으로 정치세력화해서 권력다툼을 한 경우는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기호학파 영남학파로 분류하여 마치 영남이 권력이 양분한 것같은 착시현상을 보이게 한 것은 심각한 조작에 가까운 왜곡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기호학파라 칭하며 충청일부와 호남을 배제하는 명칭을 쓰는데 정말 이러면 안됩니다.... 호남은 노론 소론 주류 정치세력이 대세였습니다....


유배에 대한 편견

유배에 대한 편견인데 과거 문인은 전라도, 무인은 경상도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배자는 조선팔도를 주기적으로 돌아 다녓습니다. 문인들 유배자가 전라도에 많은 것은 그나마 편한 곳으로 보낸 전관예우라고 보면 됩니다.

반역반란

민감한 부분까지 왜곡이 심하니 정말 할 말 없네요 바로 잡습니다.

반역 반란인데 이거 경상도 정말 할 말 없습니다. 젤 많았습니다.(이유는 농경사회에서 변방이었고 먹고살기 힘들었기 때문이지요). 단 다른지역 반란건만 부각시킨거지요. 그리고 같은 반역이라 하더라도 피해를 심하게 당했습니다. 호남은 고려조 조선조 반역 반란 8도에서 최저입니다. 동학혁명 이후는 외세에 대한 저항이므로 이런것까지 설마 호남폄하에 이용하진 않겠지요

예를 들면 고려시대내내 김사미 효심난,경주민란,진주민란,밀성(밀양),최산 이유의 난등 신라부흥운동 성격의 반란이 발생하고 무수히 진압당합니다. 그나마 우대해주던 경주까지 천민주거지역으로 강등되었고 경상도는 명칭까지 바뀝니다.(상진안동도) 천민집단 주거지인 향소부곡 400군데 중 50%가 경상도에 지정될 정도입니다. 고려시대 경상도 인구는 전체 10%~20%정도입니다.

참고로 향소부곡은 군현에 포함되지 않는 행정구역으로 피정복민,반란지역,등에 지정되고 거주지 제한됩니다.

다른지역보다 경상도 지역에 서민들 성씨가 많고 스포츠에서 좋은 타자와 힘 있는 장사들이 많이 배출되는 이유가 있는 겁니다. 평야지역은 상대적으로 학자, 예술가들이 많이 배출되지요

조선시대에는 이인좌 난을 계기로 경상도는 관직등용 금지됩니다(영남토벌비). 지역차별 성격이 전혀 아닙니다. 조선 중기 이후로 자리는 한정돼 있고 양반은 늘어나다 보니 경제적 영향력이 적은 경상도 지역의 출사길을 막아 버린 겁니다. 평야지역은 반란은 일어나도 반란으로만 끝나지요 출사길까지 막지 못합니다. 경제적인 영향력이 너무 컷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반대지요. 같은 사건 잘못이더라도 경상도는 다른지역보다도 상대적으로 면피합니다. 이쯤돼면 이해가시겟죠

훈요십조 논란(필독입니다.)

경상도 독점을 위한 가장 한심한 해석입니다. 후손들에게 부끄러워 해야 합니다.

고려 창건시 나주지역의 호족의 결정적인 도움을 받앗고 이후 농경사회에서 전라도 위상은 남달랏습니다.(옛부터 농경사회에서 호남은 토지, 바다, 뻘 3개농토가 있다고 하여서 가장 축복받은 땅이라 하였습니다.) 따라서 두가지 설이 존재합니다.

조작설

구술로만 전해져 오던 훈요십조가 등장한 건 8대 헌종때인데 거란침입으로 소실된 기록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최항과 최제안이 경상도 관료인데, 최제안이 최항의 집에서 발견되었다며 가져오게 되면서 조작설이 나오게 됩니다(박해받던 시절에 대한 반발심리이도 있지만 특정지역을 배제하여 상대적인 이익을 누릴려는 정치적인 목적일 가능성)


해석의 차이

지도를 보면서 봅시다. 평소 지도 같은 것은 안보는 분 많죠 ㅎ ㅎ

차령산맥이남 공주강 외 지역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차령산맥 이하라 하게 되면 경상지역, 충청지역, 전라지역 모두 포함됩니다.(고려영토 2/3에 해당합니다.) 경상도는 소백산맥이 따로 있으니 괜찮다구요 ! 그럼 전라도는 노령산맥이 있으니 괜찮겠네요

그럼 중요한건 공주강(금강이라는 통설) 외라는 표현인데 금강은 거의 차령산맥 방향으로 곡선도 아닌 U자 형태로 볼록합니다. 즉 공주강(금강) 외라함은 공주강(금강) 위를 지칭하는 겁니다. 설령 아래라 지칭해도 거의 U장형태 안의 지역에(전북 일부, 충청 일부) 불과합니다.

그리고 한자어 특성상 외라는 표현은 바깥이라는 표현과 위라는 표현이 혼용되고 있었습니다.

즉 고려초 후백제계가 주류인 상황에서 전혀 이치에 맞지않고 다른 훈요십조 내용과 상반되는 모순이 발생합니다 또한 2대 혜종의 어머니는 나주출신입니다.

따라서 실제 기록이라면 차령이남 공주강 위 특정지역만 한정한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실질적으로 이지역에서 왕건이 건국시기에 저항과 반역등 많은 고난을 겪습니다.

하지만 고려조는 개경과 나주호족의 연합정부 형태임을 보았을 때 후대에서 위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평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습니다....


지역감정의 폐혜

지역감정의 폐혜는 상당히 심각합니다. 경상도 권력은 권좌에 있을 때는 당연하게 생각햇지만 야당 10년 하면서 향수를 강하게 느끼고 있으며, 전라도는 아직 배고프다고 느끼고 있고, 충청도도 그동안 양반소리를 듣는게 더 좋아 속으로만 끙끙 앓다가 최근에는 우리도 곁불만 쬐지 말자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강원도도 우리지역 출신 대통령 만들어 보자고 하고 있습니다. 즉 나라와 민족의 장래보다는 지역주의 한탕주의 중심의 폐혜가 심각한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된 것에 대해 경상도 권력가는 역사 앞에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영남 권력이 과거의 역사를 인정하고 현재의 주도권의 당위성을 강조했으면 지금과 같은 심각한 지역감정이 발생했을까요 ?

역사 왜곡이 심각하고 이를 계몽하지 않으면 지역감정을 치유 할 수 없고, 다른 지역의 훌륭한 인재가 배제 되면 그만큼 민족적인 손실이 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전라도 위주로 역사를 다시 한번 정리해 보지요. 하지만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경상도 지역은 박정희 이후로 이미 부각될 만큼 부각이 되었습니다.


남북국시대(통일신라 , 발해)

역사적으로 타민족 끌어들인것은 잘못 된거지만 이후 통일 왕조가 유지되는 기틀을 제공하는 시기입니다.

그러지 않앗으면 아직까지도 한반도에 여러나라가 존재햇을 가능성 배제 못합니다.

그런데 통일 과정이 석연치 않습니다....

위진 남북조의 혼란기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는 고구려와 동북아 패권을 다툰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인류역사상 최대규모 전투라 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와 전쟁에서 패한 수나라는 극도로 피폐해져 멸망하게 되고 당나라가 뒤를 잇게 됩니다.....(참고로 중국은 한족과 북방민족의 대결과 통합의 역사라 할 수 있으며, 통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즉 대륙의 새로운 강자가 나타나면 왕조가 바뀌게 되지요,,,,따라서 중국 왕조의 역사가 짧아지는 이유입니다.) 즉 수나라, 당나라는 북방의 돌궐과 고구려를 제압하여야 안심을 할 수 있는 겁니다.

당나라는 수나라를 교훈삼아 정예병력으로 고구려를 침략하게 되나 연개소문의 고구려에 패하며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됩니다. 즉 수나라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커지게 된거지요

따라서 전략을 수정하게 됩니다... 역사는 김춘추가 요청하여 당나라가 군대를 보냇다고 하나 세계역사상 부탁한다고 군대를 파견하는 경우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당의 전략은 남쪽과 북쪽에서 동시 협공을 하는 것으로 먼저 백제를 공격하게 됩니다.... 즉 신라를 끌어들인거지요..... 백제 공략시 황산벌 전투만 기억하시는데 백제군이 5천뿐이었을 까요.... 그 당시 백제는 무시할 수 없는 물적자원과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즉 백제의 주력부대는 상륙한 당나라에 대거 투입되고, 황산벌에서는 신라와 교착을 선택하게 됩니다....주력부대가 당나라에 돌파를 당하자 황산벌의 방어도 무의미 해지면서 백제는 멸망하게 됩니다... 즉 백제는 동북아 최강군대인 당나라에게 당한겁니다...의자왕이 사치해서 망햇다고 하는데, 신라왕과 당나라왕은 특별히 검소햇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는 역사는 승자의 것이므로 그리 묘사 되었다고 봐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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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고구려는 왜 가만히 있었을 까요? 고구려는 수,당과 수차례 전쟁으로 소모가 많았으며 북방 요동전선방어에도 벅찬상황이었습니다..... 즉 당나라는 현재 미국처럼 여러지역 동시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있었던 거지요 (Win-Win 전략) 즉 백제의 멸망으로 고구려의 멸망은 시간 문제가 된 것이죠,,,, 전세가 불리하니 당연히 내분이 생기게 되구요,,,, 연개소문이 있었더라도 어쩌도 못 할 상황이 되어 버린거지요....

즉 당나라가 만약 백제 공략에 실패하고, 고구려 정복도 수포로 돌아갔다면, 변변한 승리없이 여러해에 걸친 전쟁에 피폐해져 당나라도 수나라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컷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후에 발생합니다..... 당나라는 웅진도독부,계림도독부,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삼국을 식민지화 해 버립니다.... 이에 신라는 반발한것이 당연하구요,,,,,그런데 신라는 당과의 전쟁에 승리햇을 까요...

당은 당시 동북아 최강 군대였는데요,,,, 그렇지요 문제는 북쪽에서 문제가 생긴겁니다.... 고구려 멸망과 당나라가 한반도에 눈을 돌린 사이 북방의 돌궐이 남하 하기 시작한겁니다....당은 신라가 문제가 아니라 장안이 공격당하게 생긴겁니다(실제로 장안이 돌궐에게 함락당합니다......따라서 당의 군대는 한반도에서 철수 하게 됩니다....남은 당의 세력은 신라와 백제와 고구려유민에게 소멸합니다...

즉 이러한 통일과정은 신라가 중앙집권을 할 수 없는 계기가 되고 각 지방 호족에게 자치권을 부여하는 지방호족 중심의 통치체계가 성립니다.... 이는 이후 신라왕족이 힘이 약해지자,, 각 호족이 발호하게 되고 후삼국으로 통합되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통일 신라의 독립성 여부입니다.... 현재 중국 역사는 통일신라를 인식하지 않고 한반도 역사를 고구려에서 고려 조선으로 바로 넘어 간다는 겁니다... 즉 이건 무얼 의미 할까요 왜 통일 신라를 인식하지 않을까요.... 의문점이 남는 부분입니다... 신라인이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는 경우가 빈번히 등장하는데 솔직히 의구심이 듭니다... 하지만 통일신라는 우리 민족의 역사이므로 중국이 어떻게 인식하든 신경쓸 필욘 없지만 정황상 불안한 건 사실입니다.

따라서 고구려를 계승한 대진국(발해)를 민족사에 정착시켜 남북국시대로 표현하고 교육시키는게 반듯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또한 역사적으로도 고구려 백제 문명도 비록 파괴 되었지만 조명받아야 하는것이 합당합니다. 가야는 망햇어도 계속 재조명 해주고 부각시켜 주잖아요 문제 있지 않습니까?


고려시대

왕건은 신라가 붕괴된지 얼마 안된 시기이므로 신라계를 중용할 이유가 전혀 없지요. 바보가 아닌 이상 말입니다. 물론 통치와 제도 노하우를 참고해야 하므로 일부 등용하긴 합니다. 회사 M&A를 해도 일단 다 정리하지는 않잖아요. 고려건국의 주 세력은 개경세력과 나주호족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고려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신라계가 장악했다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다고 합니다.

김부식은 개경파이지 신라토착민들이 대거 등용된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일종의 착시현상이지요


고려초 권력은 백제계가 장악합니다. 왕건이 애지중지한 신숭겸 장군아시죠 전라도 곡성출신(평산신씨로 검색하면 정확히 나옵니다) 입니다. 전라도 출신 왕비와 왕자, 도선국사, 최지몽, 박영규등 중용하여 권력의 절반을 전라도출신에게 의지합니다. 또한 송광사에서 수많은 국사가 배출됨을 보면 불교국가인 고려에서의 호남의 위상은 높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후 개성주변 경기도 권력가들이 많이 등장(경상도가 본관인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살기편한 평야지역으로 거지지를 옮긴 토착민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호남은 나주호족과 관계가 긴밀하고 이후로도 무수히 많이 배출됩니다.


경상도는 김사미/효심난,경주민란,진주민란,밀성(밀양)민란,최산,이유의 난, 경주별초군의 난등(당시로 보면 신라재건운동일수도 있죠)으로 그나마 우대하던 경주까지 천민주거지역으로 강등되고 경상도는 명칭까지 바뀝니다(상진안동도). 밀양의 오치재는 까마귀가 반란군을 뜯어먹는다는 뜻입니다.

이는 천민주거단지인 향소부곡의 400여개중 200개가 넘는 향소부곡을 경상도에 지정하게 되는 이유가 됩니다.

거란등 침략할때 왕의 피난처는 전라도 지역이었습니다. 이또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경상도는 과거 신라본토였기에 불안한 것이 이유엿고. 전라도지역은 나주호족과 관계가 긴밀하고 풍부한 산물과 인구가 형성되어 있어서 재기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

전라도는 사실상 왕조의 발상지로 우대를 받던 지역입니다. 이성계가 전주이씨이며 전주에 경기전을 지여 6대조와 이성계를 모시고 선비들로 하여금 떠받들도록 하였습니다. 임진왜란때 전라도지역의 피해가 적고 전주사고가 유지된건 왕조차원에서 필사적으로 방어한 것이 그 이유입니다(경제적으론 농지보존이겟죠)

영남은 인조반정시 경상우도 이인좌의 난 계기 경상도 전체 관직등용 금지됩니다. 두 사건 또한 영남이 주축은 아니지만,,,, 단지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이 적은 영남이 피해를 당합니다

그리고 다른지역도 문제가 발생하면 반역도로 찍힙니다. 충청도는 도까지 강등될 뻔 했습니다.


일제시대

조선말 일제의 침탈때 가장 극렬하게 저항햇던 곳이 전라도이며 또한 수탈도 심했읍니다. 그러한 사실을 일제가 악의적으로 탄압하면서 식민사관에도 인용됩니다.

호남민의 결사적인 저항에 대해, 일본은 남한 대토벌작전으로 대응하였고,,,사실상 정규전이었습니다. 힘없이 나라를 뺏기는 오명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으며, 망해가는 왕조에 대한 최후의 충성이자 조선의 마지막 자존심이었읍니다. 이런 민족적인 자부심을 왜 애써 외면할까요.. 비록 식민사관에 근거한 경상도사관이지만 정말 반성해야 합니다.

광주학생운동은 많이 알려 졋으니 따로 설명은 필요 없을 것 같구요

참고로 고려 삼별초 항쟁은 전라도가 본거지였습니다.....그만큼 호남은 주류사회였으며 지키고자 하는 열망이 강햇음을 알수 있습니다.

이와같은 점을 보았을 때 호남은 고려조 조선조상 특별한 역사적인 흠집을 찾아보기 힘들며 차별에 대한 흔적도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영남이 피해를 보고 소외를 받은 경우가 빈번하고 뿌리가 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식민사관에 근거한 영남사관의 폐혜가 생각보다 심각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건국초기

건국을 주도한 세력은 한민당인데 전라도가 본거지이며 이승만 대통령은 전주이씨입니다. 당시 10대기업 절반이 호남세력임을 보면 사실상 60년대까지 전라도가 주류엿습니다. 박정희도 윤보선과 선거에서 이긴것은 전라도의 압도적인 지지 덕분이죠


박정희 시대 이후

결정적으로 영남지역이 통일신라이후 천년만에 한반도의 주류로 등장한 역사적인 시기입니다.

재계의 10대그룹 대부분이 경상도 출신들로 이뤄지고 전라도 뿐만 아니라 다른지역도 경제개발에서 배제되게 됩니다 물론 냉전시대 미국과 일본축인 영남지역이 개발이 이뤄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역사의 이치입니다. 당분간 한반도의 주류는 경상도가 될 것으로 판단됩니다. 하지만 왕조국가도 아니고 민주주의 국가에서 지나친 감이 없지않아 있습니다.

지역감정은 어느지역 어느 사회에나 존재합니다. 지금은 경상도가 주류인 사회이고 경제개발의 결정적인 공로를 세웟습니다. 전라도도 인정할 건 인정하고 넘어가야 겠지요, 그런데 지나치게 왜곡된 역사에 자존감을 상실한 전라도가 이해할 수 있는 여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윗글도 전라도 위주로 작성하였지만 어디까지나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전라도 분들이 상심할 이유가 전혀 없고, 다른지역 사람들이 정치인들이 조작한 지역감정에 휩쓸려 일방적으로 특정지역을 매도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농경사회에 권력과 부를 누리던 전라도, 산업사회에서 국부를 일군 경상도 지역감정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단 건전한 경쟁을 통해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왕조시대를 관통하여 대부분을 주류지역으로 대접받던 전라도가 지나친 피해의식을 가질만한 역사적인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부디 상대를 인정하는 여유를 찾기를 바라며, 경상도 지역은 산업화의 주력세력이자 지리적으로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최일선에 위치하고 있으며, 앞으로 국부를 키우고 위상을 높이는 중요한 역활을 담당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민주주의 이므로 지나친 독점은 모두에게 좋지만은 않은것 같습니다. 그리고 서해안 시대가 도래할 확률이 높으므로 좀더 거시적으로 그리고 대국적으로 발전했으면 합니다.

지역감정이 지나치면 망국의 지름길입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따라서 정확한 역사지식에 근거하여 특정지역이 지나치게 왜곡되지 않도록 권장하고 선도하는 정치인들의 역활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상호 존중하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망국적인 지역감정이 건전한 지역경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글을 올립니다. 짧게 되지 않네요 역사를 관통하다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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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여사 2019.12.05 06: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5.18은 진행중입니다.아직 끝나지않았습니다/
    5.18이 광주시태라면 전 두환대통령은 큰 피해자라는것입니다

  • 장여사 2019.12.05 06: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비오신부가 명예훼손으로 고발했다고하는데/
    호남인들에게 따져야합니다/
    21일 카톨릭쎈타위에서 하얀 와이셔츠를입고/
    광주시민을 향하여 총을 쏜자는 누구인가/
    조비오신부인가/북한군인가/ 광주 시민군인가/
    5.18은21일 카빈총으로 맞은 장갑차위의/
    조 사천씨를 슬쩍감추고 뒤집었기 때문에/
    40년이 다가오는 이 시점에도 문제가되는것입니다/
    미국에 계시다는 김 대령목사님께서/
    제의견을 인터넷 대화로듣고/
    ㅇ.역사로서의 5.18 4권/
    ㅇ.임을위한 행진곡/
    ㅇ.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
    상세히 기록되어있으니 참고/